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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위로의 미술관] 클로드 모네

by 그림그리는소녀 2023.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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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1840 - 1926

인상주의의 창시자이며,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화가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대상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전통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빛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대상의 색과 형태를 포착하여 그리는 인상주의로 당대 미술계의 새로운 움직임을 일으켰습니다.

인상주의라는 말 자체가 클로드 모네의 그림 중 매우 중요한,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에서 시작이 됩니다. 이 그림은 1874년 모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에드가 드가를 포함한 일군의 화가들이 개최했던 '앵데팡당 전(展) ( Salon des Artistes Indépendants )' 에 처음으로 선보였는데, 이 전시에 대한 비평문에서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인상, 해돋이>가 스케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으며,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 전시회에 '인상주의자의 전시회'라는 별칭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인상주의자라는 단어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카달로그에 실릴 제목을 나에게 물어보는데, 이 그림을 르아브르(프랑스 노르망 레지옹 센마리팀 주에 위치한 항구도시) 풍경이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없어서 그냥 인상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다른 인상파 화가들조차 빛의 변화를 포착하는 데에만 집중해서 대상 자체의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고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인상주의의 한계를 자각하고 화풍을 바꿀 때까지도 그만은 끝까지 인상주의 화풍을 고수했습니다. 인상주의를 시작하고 인상주의를 끝까지 지킨, 실로 인상파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오늘날 인상파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작품의 대부분이 바로 그의 작품입니다.

[나무위키] 


쉽지 않았던 인상파의 길

클로드 모네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누구에게도 그림을 배운 적이 없었지만 르아브르 미술 중학교에 입학했고, 캐리커처를 그려 화상에 팔 정도로 당찬 성격과 소질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그런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화가 외젠 부댕은 인물의 특징을 빠르게 잡아내는 모네의 능력을 풍경화로 옮겨가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여인 카미유 동시외를 만납니다. 그녀는 모네의 모델로 여러 차례 캔버스 앞에 섰고 둘은 조금씩 가까워지며 사랑에 빠집니다. 동시외와 모네는 결혼 전에 아이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19세기 모델이라는 직업은 형편이 좋지 않은 여성들의 일이었고, 가끔은 모델 이상의 일까지 하는 평판이 좋지 않은 일이기도 했습니다.  모네의 집안에서는 동시외와의 만남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모네가 결혼을 선택하자 보내오던 지원금을 중단합니다. 

클로드 모네&#44;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44; 카미유 동시외
클로드 모네,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 카미유 동시외>, 1866

모네는 서양 미술계에서 500년 이상 이어져 온 종교, 역사 신화와 같은 주제나 3차원을 2차원으로 정밀하게 그려내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모네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근대 세상 속에 뛰어들고,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쫓아 자신의 눈에 비치는 순간을 캔버스에 담고 싶어했습니다. 동시외는 그를 이해했고, 역경을 헤치며 아이와 함께 묵묵히 가정을 꾸려나갑니다. 그러나 끊긴 지원금, 팔리지 않는 작품은 점점 가족을 가난하게 만들었고, 결국 모네는 센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거두려 하는 무모한 짓까지 저지릅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모네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후원자와 화상이 나타났고, 동료들과 보수적인 성격의 국가 살롱전이 아닌 자신들만의 색을 보여줄 독립전시회를 계획합니다. 첫번째 독립 전시회에 출품한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본질을 그린 것이 아닌 정말 인상만을 그린, 인상적으로 서툰 그림이라며 멸시를 당했고 참가한 화가들도 '인상파'라고 불리며 조동당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클로드 모네&#44; 인상&#44; 해돋이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카미유의 죽음

모네는 인상파 초기 모임의 핵심 멤버이자 리더로 역할을 다하며 자신과 동료들의 예술 세계를 알려 나갑니다. 그러나 부인 동시외가 둘째 아이를 낳은 후 서른 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병이 들어 결국 이별을 맞이한다. 

클로드 모네&#44; 죽어가는 카미유
클로드 모네, <죽어가는 카미유>, 1879

"동시외의 얼굴색이 죽음으로 인해 미묘하게 변해가는데, 그것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고통스러웠다" 라며 동시외가 세상을 떠나고 한참이 흐른 후, 친구 클레망소에게 고백했습니다. 붓을 놓기 전에 마지막으로 써넣은 사인 끝의 검은 하트를 보면 모네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빛에 대한 끝없는 탐구, 연작

1890년, 그는 지베르니 들판에 쌓인 건초더미를 보고 시간과 날씨에 따라 빛의 형태가 다양하게 변화한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빛을 탐구하는 여정을, 빛과 날씨의 분위기에 따라 대상을 연속해서 그리는 방식을 발전시킵니다. 그리고 뒤랑 뤼엘 화랑에서 15점의 <건초더미> 연작을 전시하며 큰 성공을 거둡니다.  화가로 성공한 모네는 지베르니의 집과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며 작품활동을 이어가던 중, 정원 연못에 떠 있는 수련을 보고 영감을 얻어 1879년부터 물과 반사광의 풍경인 <수련> 연작을 그리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250점의 작품을 완성한다. 

클로드 모네&#44; 늦여름에 건초더미&#44; 아침효과
클로드 모네, <늦여름의 건초더미, 아침효과>, 1891
클로드 모네&#44; 아침에 건조더미&#44; 눈효과&#44; 1891
클로드 모네,<아침에 건초더미, 눈효과>, 1891
클로드 모네&#44; 건초더미&#44; 눈효과
클로드 모네,<건초더미, 눈효과>, 1890-1891

수련에 담긴 위로

모네는 말년에 다시 시련이 찾아옵니다. 재혼한 아내가 1911년에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1912년에는 너무 오랜 시간 강한 빛을 마주 보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기에 백내장이 발병합니다. 또, 1914년 카미유가 남긴 가장 큰 선물, 큰아들 장이 46세의 이른 나이에 병이 들어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많은 이들이 이제 모네가 붓을 놓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이자 당시 프랑스 총리였던 조르주 클레망소가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을 위한 대형 <수련> 연작을 의뢰했고, 그는 인생의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게 된 것입니다. 

클로드 모네&#44; 수련:녹색반사
클로드 모네, <수련:녹색반사>, 1914 - 1926

계속된 작업에 앞을 볼 수 없게 되자, 오랜 시간 두려워 거절했던 수술대에 오릅니다. 수술에 실패해 앞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마지막 걸작을 향한 그의 의지가 강했던 것입니다. 1926년 평소 담배를 즐겨 피우던 그에게 폐암이 생겼고 그해 12월, 모네는 생을 마감합니다. 

[위로의 미술관] 클로드 모네

모네는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작품을 통해, 지치고 고단한 사람들에게 수련이 흐드러진 고요한 연못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안식을 선사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클로드 모네의 인생과 그의 작품을 통해, 아내를 잃은 슬픔,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의 슬픔이 느껴집니다. 모네는 다른 사람이 대신 아파해  줄 수 없는 혼자만의 깊은 고독을 알기에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누군가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자 했던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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