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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위로의 미술관] 오귀스트 르누아르

by 그림그리는소녀 2023.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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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르누아(AugusteRenoir ), 1841 - 1919

오귀스트 르누아르

프랑스리모주 출생. 4세 때 파리로 이사하였습니다. 집안이 가난한 양복점이어서 13세부터 도자기공장에 들어가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색채를 익힌 것이 뒤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점심시간에는 루브르미술관에서 J.A.와토나 B. 부셰 등의 작품에 이끌려 화가가 될 것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4년 후 기계화의 물결에 밀려 실직, 겨우 부채그림이나 점포장식 등을 하였습니다. 1862년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C.모네, A.시슬레, 바지위 등을 알게 되고 또 C.피사로, P.세잔, J.B.A.기요맹과도 사귀어, 훗날 인상파운동을 지향한 젊은 혁신화가들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초기에는 코모, 들라크루아, 쿠르베 등의 영향을 받았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종군한 후에는 작풍도 점차 밝아졌습니다. 그리하여 인상파의 기치를 든 1874년 제1회 전람회에는 《판자 관람석》(1874)을 출품하였고, 계속하여 제2회와 제3회에도 참가하여, 한동안 인상파 그룹의 한 사람으로서 더욱더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표현을 전개하였습니다. 대작(大作) 《물랭 드 라 갈레트LeMoulindelaGalette》(1876)와 《샤토에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1879)은 인상파시대의 대표작입니다.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 라파엘로나폼페이의 벽화에서 감동을 받고부터는 그의 화풍도 마침내 한 전기(轉機)를 맞이하였습니다. 귀국 후 얼마 동안의 작품은 색감과 묘법(描法)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즉 담백한 색조로써 선과 포름을 명확하게 그려서 화면구성에 깊은 의미를 쏟은 고전적인 경향을 띤 작품들로 《목욕하는 여인들》(1884~1887) 등을 그렸습니다. 그 후는 완전히 인상파에서 이탈하여 재차 독자적인 풍부한 색채표현을 되찾아 원색대비에 의한 원숙한 작풍을 확립하였습니다. 더욱이 1890년대부터는 꽃 ·어린이 ·여성상, 특히 《나부(裸婦)》(1888) 등은 강한 의욕으로 빨강이나 주황색과 황색을 초록이나 청색 따위의 엷은 색채로 떠올리면서 부드럽고 미묘한 대상의 뉘앙스를 관능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프랑스 미술의 우아한 전통을 근대에 계승한 뛰어난 색채가로서, 1900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만년에는 지병인류머티즘성관절염때문에 손가락에 연필을 매고 그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제작하는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최후 10년 간은 조수를 써서 조각에도 손대어 《모자(母子)》(1916)와 같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아름다움이 주는 위로

르누아르는 어릴 적 그림보다 음악에 더 소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넉넉하지 못한 가정 형편에 음악을 포기하고,열세 살부터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시작합니다. 낮에는 일하며 저녁에는 그림 실력을 길렀고, 성년이 되어 파리 국립 미술 학교와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 배움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화실에서 모네, 바지유, 시슬리를 만나며 화가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이들은 답답한 화실보다 야외에 나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역사화, 종교화 같은 고전 미술을 거부하고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을 캔버스에 담으려 했습니다.

1874년 르누아르는 모네, 세잔, 드가, 피사로등 30명의 동료와 함께 살롱전에 반대하며 무명 화가, 조각가, 판화가들의 모임을 조직한 후 자신들만의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하지만, '인상주의, 인상파'라는 비하가 담긴 명칭만을 얻게 됩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주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풍경화를 주로 그리던 동료들과 달리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즐거움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1870년대 프랑스와 프로센의 전쟁, 1871년 파리 코뮌으로 벌어진 내전을 몸소 겪으며 참혹한 현실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경험은 르누아르의 예술 주제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는 자신의 캔버스에 현실의 괴로움보다 즐겁고 아름다운 주제를 그려서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합니다.  1870년대 몸마르트의 갈레트 방앗간이 무도회장으로 바뀌면서 파리지앵들의 유흥 중심지로 떠오릅니다. 가까운 곳에 작업실이 있던 르누아르는 이곳의 분위기에 흠뻑 빠졌고, 스케치를 위해 폭이 1.8m나 되는 캔버스를 짊어지고 여러 차례 방문하는 열의를 보이며 무도회장의 흥겨움과 즐거움을 담아냈습니다.  

외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

르누아르는 이 작품의 구성을 위해 숱하게 습작하며 균형감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특히 후경에 춤을 추며 관람자와 눈을 마주치는 커플을 배치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진 전경 인물에 모든 시선을 빼앗기지 않도록 구성했습니다. 또 색을 엷게 칠하고 색감이 번지게 하여 빛이 퍼지는 듯한 효과를 주면서 무도회장의 생동감과 순간의 인상을 표현하였습니다.  역사화가 아닌 작품을 이렇게 큰 캔버스에 그릴 필요가 있냐는 비난도 받았지만 게속되는 인상파들의 도전에 그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샤교계를 주름 잡던 샤르팡티에 부인이 르누아르의 재능을 높이 사며, 자신의 초상화를 주문합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44; 샤르팡티에 부인의 초상화
오귀스트 르누아르,<샤르팡티에 부인의 초상화>, 1876-1877

르누아르는 기존의 엄격하고 근엄한 느낌이 아닌,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잘 살린 초상화를 그렸고, 부인은 그의 그림에 크게 만족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알던 예술계 사람들과 부유층 부인들에게 르누아르를 소개하였습니다. 사교계 부인들은 유행하는 드레스를 입고 르누아르에게 초상화를 부탁했습니다.  어릴적 부모님의 직업이 재단사와 재봉사였던 영향으로 복식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높았던 그는 멋진 작품으로 그들을 만족시켰고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1879년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을 그린 작품이 살롱전에서 대성공을 거두며 명성은 더욱 높아집니다. 

인상주의와의 결별

경제적 여유가 생긴 르누아르는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이탈리아 여행에서 만난 라파엘로의 작품에 크게 감명받아 그동안 형태를 흐릿하게 표현해오던 기존의 방식에서, 선을 더 강조하고 윤곽을 뚜렷하게 그리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44;&lt;부지발에서의 춤&gt;
오귀스트 르누아르,<부지발에서의 춤>, 1883
오귀스트 르누아르&#44;&lt;부지발에서의 춤&gt;
오귀스트 르누아르,<도시에서의 춤>, 1883
오귀스트 르누아르, <시골에서의 춤>, 1883

<부지발에서의 춤>과 <도시에서의 춤>에서는 몽마르트에서 활동하는 인기 모델 수잔 발라동을 그렸지만, <시골에서의 춤>에는 (훗날 자신의 부인이 되는) 자신의 여자 친구 알린 샤리고를 그려 넣었습니다. 작품은 바티칸에 그려진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 처럼 장식적인 요소를 겸하기 위해 거의 실물 크기로 인물들을 꽉 채워 그렸습니다. 인상파 시절의 작품<물랭 드 갈레트의 무도회>와 비교하면 색채가 단순해지고 윤곽과 형태는 더 두드러진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인상파가 세상의 조롱을 받던 시절부터 그들을 옹호했던 한 비평가는 르누아르의 변화에 대해 "20년 동안 쌓아 올린 매력적이고 기쁨이 넘치는 회화를 단 2년 만에 파괴했다" 라며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끊임없이 도전하고 탐구하며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걷습니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답니다

르누아르는 성공의 길을 걷습니다. 작품 판매도 순조로웠고, 명성이 높아져 국가에서 작품을 구매하고, 훈장을 수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50세가 넘는 그에게 10년전, 자전거에서 떨어져 오른팔이 부러졌을 때도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며 강한 의지를 보였던 그에게 류머티즘 관절염이 찾아온 것입니다.  뼈나 관절이 단단하게 굳고 통증이 생기는 이 병은 매일 붓을 쥐고 팔을 써야 하는 화가에게는 치명적인 질병이었습니다.  해를 거듭하며 그느 지팡이를 짚고 걸어야 했고, 50대 후반에는 오른팔이 마비됩니다. 70대가 되어서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했고, 결국 손가락이 모두 뒤틀립니다. 그러나 60년의 화가 생활동안 약 6,000점의 작품을 남긴 그는 하루도 그림을 그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르누아르에게 그림 그리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텐데 왜 계속 그림을 그리는지 묻습니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기에 그림을 그린다"

라고 답합니다. 

[위로의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말년에 손가락이 뒤틀려 붓을 쥐는 것이 어려웠을 때도 손에 붕대를 감고 그림을 그렸다는 르누아르. 그가 그림속에 담고 싶었던 것은 우리가 보아도 알수 있는 웃음, 행복, 기쁨이 아니었을까요? 코미디 영화를 보면 웃음을 짓는 것처럼 그의 그림을 보면 즐거운 파티에서 마음껏 춤을 추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몸은 따라주지 않아도 르누아르도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웃음을 머금고 행복한 표정과 동작을 상상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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